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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한국명 가등청정), 1562년 7월 25일 ~ 1611년 8월 2일 아즈치모모야마시대 부터
에도시대 전기까지의 무장, 다이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다.
다른 6명의 무장들과 더불어 시즈카타케의 칠본창 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통칭은 도라노스케 축성술이 뛰어나고 호랑이 사냥을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임진왜란 때 제2군 사령관이었고 정유재란 때에도 참전하였다.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에는 같은 히데요시의 가신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대립하여
세키가하라 전투 시기에는 도쿠가와 에이야스 측인 동군 소속이 되어
전후 54만 석의 영지를 거느린 센고쿠 다이묘이자 구마모토번 초대 번주가 되었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갑옷 가토 기요마사는 기요타다의 차남으로 오와리국 아이치 군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히데요시와 같은 고향출신으로 아명은 야샤마루이고 성인식을 치른 후에 도라노스케 기요마사라고 불렸다.
어려서부터 히데요시를 주군으로 섬겼으며 1580년 하리마 국 진토군의 영지 120석을 받았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무공울 세우며 칠본창의 일인으로 활동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기요마사는 나베시마 가문, 가미료 가문과 함께 1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병하여
군사 파견수 2위를 차지하였다. 1592년 4월 18일 부산에 도착 한 이후 파죽지세로 한양에 도달하였다.
또 북상하여 함경도 회령에까지 이르렀고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다
또 여진족 우량하국에까지 진입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패퇴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군대를 돌려야 했다.
한양에서는 이미 이시다 미쓰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강화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에 따라 포로로 잡은 2명의 왕자는 돌려보내야만 했다.
1597년 정유재란에 출정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기요마사는 다시 1만 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조선, 명나라 군대의 습격을 받아 울산성에서 농성하며 고전하다 구사일생으로 귀국하였다.
이때 물을 구하러 성밖으로 나가면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수시로 받으니 물이 없어 말의 피를 마셨으며
먹을 게 없어 말을 잡아먹었는데 맛이 좋았던지 지금도 가토의 영지였던 구마모토에 가면 마사회가 유명하다.

울산왜성을 포위한 조명연합군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가토 기요마사와 호소카와 다다오키 등은
이시다 미쓰나리 등의 정책 수행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1599년 미쓰나리 살해 계획을 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간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중지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자 기요마사는 규슈에서 동군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우토의 고니 가문, 야나가와의 다치바나 가문을 공격하였다.
전후에는 히고 지역의 54만석 영주가 되었다. 실제 석고 (石高) 는 약 74만석 이였다.

세키가하라 전투 임진왜란에 들인 막대한 비용 탓에 영자 내 사정이 나빠지자 이를 메울 목적으로
기요마사는 나가사키에서 필리핀 무역을 하던 하라다 키에몬 에게 의뢰하여 소막 무역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필리핀무역을 계획하던 중 1597년 정유재란 동원령이 내려지면서 중지되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재정을 강화하려 큰 배를 건하고 주인선(무역 허가선)을 조직하여
베트남, 태국과도 교역하였다.
기요마사는 1601년부터 쓰보이 강의 수로를 이용한 웅대한 구마모토 성을 건축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을 동원해 쌓았다 한다. 오늘날 나고야 성, 오사카 성과 함께
일본의 3대 성으로 꼽히고 있다. 성을 만들어진 것 과 함께 구마모토 조카마치(거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가
형성되었다. 그는 새로운 영지 개발을 위해 하천공사에 주력했다.
현재 구마모토 평야는 기요마사의 새 영지 개발정책이 그 바탕이 되었다.
또 하천의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일련종의 열렬한 신자였기 때문에 조카마치와 영내에 일련종 사원의 건립을 진행함과 동시에
1603년과 1608년에 크리스트교 신자를 탄압하는 정책을 취했다.

구마모토성 만년이 되자 기요마사는 점차 무인으로서의 성격이 약해졌으며 대신 문예와 다도에 심취하였다.
그는 가토 가문의 존속을 위해 도쿠가와막부 하 에서 완전히 복장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1606년과 1610년 에도성(현 도쿄)과 오사카성 공사에도 솔선하여 임하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리(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들)를 설득하여 1611년 3월에
니죠 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을 성사시켰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가에 충성을 지키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한다.
자신의 영지였던 구마모토 성에 별실을 만들어 만일의 경우가 생기면
히데요리를 이곳으로 모시려는 계획을 세웠고 구마모토에서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 성까지
3일 만에 갈 수 있는 바닷길을 정비했다.
1611년 3월 28일 기요마사는 니죠 성에서 이에야스와 히데요리가 회견할 때는 품에 단도를 숨기고
히데요리를 보호하고 무사히 회견을 마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것으로 주군이었던 히데요시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고 안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3개월 후 인 1611년 6월 24일에 50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유해는 구마모토의 혼묘 사에 묻혔으며 현재도 일련종 신자의 참배가 이어지고 있다.
오사카 전투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천하를 움켜진 후에는 서서히 몰락했다.
(오사카전투는 1614년에서 1615년까지 일본에서 에도 막부와 도요토미 일족 사이에 벌어진 전쟁)
도쿠가와 막부에게 가토 기요마사는 여전히 전 주군인 도요토미 가문의 충신이었고
도쿠가와 가문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가토 기요마사 가문을 몰락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들 가토 타다히로(1601 ~ 1653)는 1632년 막부 주도하의 2차 개역작업에 휘말려 영지를 몰수당했다.
당장은 데와 마루오카 번 1만 석을 새로 부여받았으나 그것도 사실상 쇼나이 번의
간접지배를 받는 영지라 이름만 영주였으며 21년 뒤 그가 사망하자 막부는
그 영지를 쇼나이 번에 정식 편입시켜 가투 가문의 개역을 완료했다.
그래도 자손들은 더 이상 숙청당하지 않은 채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후 메이지 유신 때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현재도 일본에 생존해 있다.

울산 서생포왜성 여담으로 그는 성 축조술에 능했다고 평가받는데 울산 서생포왜성은 기요마사가 일본식 건축방법으로
돌을 사용해 계단식으로 쌓은 왜성이다. 특이한 점은 성벽이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일본식 성곽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성곽을 만들 때 에도 일시적으로 응용된 적이 있다.
16세기말의 일본성곽을 연구하는데 사용된다. 지금은 성축 성벽만 남아있지만 비교적 뚜렷한 편이다.
비록 일본이 쌓았으나 뒤에 조선에서도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