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쓰이그룹 미쓰이 그룹 (三井 グループ, MITSUI GROUP, 한국식 발음 : 삼정 그룹)
은 미쓰비시 그룹, 스미토모 그룹과 함께 일본의 3대 제벌 그룹 중 하나이다.
미쓰이 재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쓰비시, 시모토모 와 함께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니키 (二木) 회를 중심으로 다시 형성된 일본을 대표하는 3대 기업집단 중 하나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미쓰이 재벌의 흐름을 따르는 기업의 연합체를 니키 (二木) 회라고 불린다.
해체되기 직전까지 미쓰이 은행과 미쓰이물산 등을 중심으로 한 일본 최대의 재벌 집단이었으며
현재는 니키회 26개 사가 연합 하고 있어 구재벌의 명성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조직의 미쓰비시, 사람의 미쓰이, 결속의 스미토모는 일본의 3대 재벌의 특징을 요약한 표현으로 유명하다.
미쓰이 그룹의 모태는 1876년 세워진 미쓰이은행과 미쓰이물산이다.
그러나 그 기원을 더 따라가면 도쿠가와시대(1603 ~ 1867)의 거상인 미쓰이( 三井) 가문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미쓰이재벌의 시조로 평가받는 미쓰이 다카토시는 1673년 교토와 에도(지금의 도쿄)에
포목점(옷감을 파는 가게)을 열었다. 미쓰이 가문의 포목점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정찰제와 현금거래를 내세웠다.
또 비가 오면 고객에게 회사 이름이 새겨진 우산을 빌려주는 등
현대식 마케팅 기법을 도입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일본의 개방을 본격화했던 메이지시대(1868~1919)에 미쓰이 가문은
은행, 무역, 광업 등에 진출하며 세력을 넓혔다.
1873년 메이지정부는 미쓰이재벌로 하여금 제1국립은행을 설립하게 하였다.
이 국립은행은 1902년에 제일은행이라는 민간은행으로 전환되어
조선의 경성에서 화파 발행의 기능을 당담하였는데
당시 설립된 건물이 현재의 서울 중구에 있는 한국은행 본관이다.
1889년 미이케 탄광을 인수해 운영했다.
미쓰이는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성장했으며
1909년 지주회사격인 미쓰이합명회사를 세우고
재벌의 면모를 갖췄다. 이후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며 세계 2차 대전이 끝날 시점에는
약 270개의 회사를 보유한 거대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쓰이 재벌은 점령국인 미국 등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해체됐다
재벌 산하 계열사들의 주식은 일반에 판매됐다. 주력 계열사였던 미쓰이은행은 세계대전 중에 다른 은행에
흡수됐다가 1948년 다시 독립했다.
1950년대 들어 옛 미쓰이재벌에 속했던 회사들이 독립 기업의 연합 형태인 키레츠(系列)로 재편되었다.
1950년 게츠요우카이(월요회, 月曜會)라는 미쓰비시그룹 친목회가 만들어졌고
1959년에는 미쓰이 그룹 계열사의 18개사 사장들의 사장회(社長會)인 니키회 (二木會)가 결성됐다.
그 후 미쓰이 재벌에 속했던 회사들이 다이이치물산을 중심으로 재결합했고
이후 이들은 미쓰이 그룹으로 발전했다.
계열사 중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기업은 도요타, 삿포로맥주, 도시바, 도레이 등이 있다.
미쓰이그룹의 모태 에치고야
미쓰이그룹의 모태인 에치고야는 에도의 포목점이었다. 창업자 미쓰이 다카토시는 거상이 많기로 유명한
이세지역 출신으로 대대로 전당, 양조업을 영위하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형제들과 함께 가업에 종사하다 51세가 되던 해인 1673년 에도 니혼바시에 에치고야를 설립했다.
에치고야 에도본점의 주된 고객은 역시 다이묘와 막부직속 가신들과 상층 조닌 (에도시대에 도시에
거주하던 장인, 상인) 들이었다. 에치고야는 상품판매에 있어 혁신적인 방식을 취했다.
당시의 상품판매방식은 견본을 가지고 고객의 집으로 방문해 주문을 받아 배달하는 방식이었다.
결제방법은 외상거래로 연 2회 결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에치고야는 기존의 관행을 깨고 점두판매와 현금거래를 고집했다.
점두판매란 점포에서 모든 취급상품을 진열하고 고객이 선택한 상품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고객을 점포로 유도하여 구매욕구를 자극하고 광고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현금거래를 통해 연 2회 수금하는 방식을
상시수금방식으로 바꾸어 자금운용에 융통성을 부여한 것이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판매 방식이지만 이 시기에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부분판매(고객이 필요한 만큼 절단판매), 즉석의류제조(재단사 상주, 고객의 취향에 맞는 의류 디자인)
등 당시로는 혁신적인 판매방법으로 번창했다.
그렇다면 방문판매에 익숙했던 고객들을 어떻게 점포로 끌어모았을까?
고급무사들과 조닌들은 굳이 점포까지 발걸음을 해야 한다는 것과 현금판매가 매우 불만스러웠지만
에치고야는 할인혜택을 지공함으로써 고객들에게 유인을 제공했다.
게다가 고객이 필요한 만큼 옷감을 잘라 팔기도 했으며
품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점원을 고용해 고객에게 상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전속 재단사를 고용해 급하게 의류가 필요한 고객의 수요에 대응했다.
당시 일본의 경제는 날로 성장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사치풍조가 늘어나 고객의 요구가 다양해진 것이다.
또한 에치고야는 오늘날의 전단지 마케팅과 같은 방식으로 고객들에게 점포를 홍보했다.
인파가 몰리는 곳에 에치고야의 로고가 그려진 우산이나 광고지 등을 뿌리는 등 마케팅을 실시했다.
에치고야는 사람들의 소비형태가 변하고 있음을 포착하고
적극적으로 고객맞춤형 서비스, 고객에게 찾아가는 서비스를 시행한 것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원 화성 (2) 2023.11.14 일본 에도시대의 경제 (2) 2023.11.13 부천의 역사 (2) 2023.11.07 서울역과 옛 대우빌딩 (0) 2023.11.05 일본은행 3대 메가뱅크 (0) 2023.11.04